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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1•Antifreeze•2014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라는 가사에 도취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세상이 혼란할때 많이 듣고 불렀다.

음식-6•딱딱한 복숭아
그 해 여름 복숭아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에 따라 여름의 행복도를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복숭아를 좋아한다. 물렁한 복숭아보다는 단단한 복숭아의 은은한 향을 좋아한다. 계절마다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는 게 나를 살게하는 것 같다.

공간-5•안락의자•2020
아주 편안한 의자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검색을 하던 중 아주 적절한 가격의 의자를 사게 됐다. 무려 판매 1위 수유의자였다. 왠지 수유의자는 몹시 편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을 하다가도 생각을 전환하고 싶을 때 안락의자로 몸의 옮겨 쉬었다.

책장-2•책 사이에 끼워둔 엽서•2019
매년 생일마다 엽서를 선물해주는 사람이 있다. 꾹꾹 눌러 쓴 손글씨를 보면 마음이 간지럽기도 하고 따뜻해진다. 오랜만에 꺼내든 책 사이에 엽서를 발견할 때면 다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반갑다.

공간-3•우리집 옥상•2019
5층 빌라의 5층 주민으로서 옥상을 맘껏 활용할 수 있다. 언덕 꼭데기에 있는 집이라 옥상에서 온 동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개운한 기분이 든다. 여름에는 조카들과 물총놀이를 하고 가을에는 나무를 자르고 니스를 칠했다.

향-3•햅쌀 밥냄새•2019
종종 동거인의 어머니께서 햅쌀을 보내주신다. 그 해에 수확한 쌀의 밥맛은 기존에 먹었던 밥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밥을 지을 때 나는 냄새도 아주 좋다. 갓지은 쌀밥과 김치, 김만 있어도 꽤나 훌륭한 한끼가 된다.

옷장-2•뜨개 모자들•2020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우울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하루종일 소파에 앉아 모자를 만들었다. 한 땀 한 땀 실을 엮다보면 내 마음도 단단히 엮여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이즈를 맞추기 위해 만드는 중간중간 내 머리에 얹어 보는데, 서서히 내 머리를 덮어가는 모자를 볼때마다 꽤나 뿌듯해졌다.

옷장-3•핸드 프린팅 천•2019
5년간 주구장창 여행만 다니던 때가 있었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작은 소품들에 질려갈 때쯤 언젠가부터 여행지에서 천 하나씩을 구입해오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샀지만 인도에서 넘어온 핸드프린팅 천은 지금도 내 작업실 창문에 느슨하게 걸려있다. 낯선 공간으로 떠나 생생하게 헤매던 그때를 아주 가끔 떠올린다.

책상-7•투명 키보드•2023
투명 키보드에 매료되어 아주 충동적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키보드에서 빛이 난다. 타자를 칠 때마다 들리는 보글보글 소리도 기분이 좋다.

책장-5•인화된 사진•2017
어릴 때 부모님이 찍어준 사진을 제외하곤 인화된 사진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에서의 나의 사진을 인화 해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물성이 있는 사진은 쉽사리 버리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액자에 끼워 책장에 올려두곤 종종 바라보았다.

옷장-7•라이딩 바람막이•2020
오토바이를 타면 바람에 강한 옷을 많이 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이 바람막이는 빛 반사 패드가 등판과 팔에 부착되어 있어 야간주행에도 큰 도움이 된다. 바람을 든든하게 막아주어 여름밤에도, 가을에도 꾸준히 챙겨입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섯개가 넘는 주머니가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향-2•바삭하게 말린 잠옷
빨래한 잠옷을 볕에 바삭하게 말린 후 입었을때 나는 냄새가 좋다. 빨래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날에는 잠이 더 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음식-7•당근 없는 카레•2017
집에서 푹 끓여먹는 카레를 좋아하지만 당근이 들어간 카레는 싫다. 독립선언 이후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더 이상 카레에 당근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양파와 가지, 방울토마토, 버섯을 서걱서걱 썰어 카레에 넣는다. 당근과 감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만 좋다.

책상-1•메모지 낙서•2019
오래 두고 생각하고 싶은 그림이나 글을 메모지에 그리고 적어 모니터에 붙여둔다. 자주 눈길이 가는 건 아니지만 시선을 옮길 때마다 스치며 보이는 메모지들이 일상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상-2•두툼한 노트•2020
매일 하루를 열심히 기록해놓던 때가 있었다. 그 날 뭘 먹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등등을 적어내려가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나를 돌보는 행위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기록이 담긴 노트들을 아주 가끔 꺼내어 본다. 그때에 했던 고민이 지금의 나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은 고민일 때도 있고,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향-1•축축한 숲냄새•2020
숲에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안개가 껴 축축한 숲냄새가 난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기분이 좋다.

옷장-1•쇼에이 헬멧•2020
125cc 저배기 오토바이를 타면서도 꾸역꾸역 풀페이스 헬멧을 썼다.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서도 쇼에이 헬멧을 쓰고 있으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헬멧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음악-3•정우의 양•2023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냅다 반성하는 첫 가사가 좋았다. 음미하며 계속 들으면 여러 장면들이 스쳐간다.

향-4•젖은 찻잎•2020
오래 우리고 꺼내어둔 찻잎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뜨거운 습기 가득 머금은 찻잎에서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음악-4•RADWIMPS의 KANATA HALUKA•2022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자주 들었다. 애니메이션 OST 특유의 희망적이고 극적인 요소들이 좋았던 것 같다. 주로 아침 출근길에 많이 들었다.

공간-1•텐트•2019
첫 내 집 마련을 하는 마음으로 텐트를 샀다. 쿠팡에서 10만원이 안되는 가격으로 내 몸 뉘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니. 이 텐트는 종종 야외에서도 사용하지만 잠이 너무 오지 않을 때, 깨끗하게 닦아 내 방에 설치해 둔다. 아늑한 기분으로 잠을 잘 수 있다.

옷장-4•구멍난 파란 티셔츠•2019
구제 티셔츠 가게에서 사온 파란 티. 아주 널널한 사이즈라 바지를 입어도 잘 안보인다. 이걸 어떻게 입으려고 사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잠옷으로 활동중이다. 하도 많이 입어 티셔츠 곳곳에 구멍이 났지만 버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입고 있으면 그냥 편하다.

음악-2•이랑의 환란의 세대•2021
"한꺼번에 싹다 가버리는 멸망"이라는 가사가 좋았다. 죽어버리자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럼에도 함께 살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노래를 끝까지 들으면 알게 된다. 사실 이 노래는 사랑노래다.

책장-3•마더피스 타로카드•2020
혼란할 때 한 장 뽑아보면 복잡하기만 하던 생각들이 명료해지기도 했다. 타로의 주술적 흐름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림을 가만히 보고 그 상징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내 안에 있던 고민이 한결 가벼워진다.

음식-4•햄버거 젤리•2017
바코드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패키지에 들어있는 젤리다. 하나에 500원쯤 하는 것 같다. 편의점 알바생은 내가 이걸 사갈 때마다 한참동안 포스기 버튼을 누르며 헤맨다. 베테랑 알바생들은 금새 찾아 계산해주는데..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다섯개씩 사서 집으로 돌아갔던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공간-4•이리카페•2017
망원동에 살았던 때에 매주 월요일마다 친구들과 이리 카페에서 만나 글을 썼다. 주제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냥 모여 앉아 한시간 넘게 글을 쓰곤 마지막에 각자 쓴 글을 읽어주었다.

공간-2•베란다•2019
한 집에서 4년 째 살고 있다. 독립이래로 최장기간 거주중이다. 집을 구할 때 최소 다섯 군데 이상은 둘러봐야 한다는데, 나는 이 집의 베란다를 보고 혹해서 첫번째 집에서 돌연 가계약서를 작성해버렸다. 작은 텃밭이 있는 넉넉한 베란다. 서울에서 찾아보기 귀한 집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겨울엔 주로 비워두지만 봄 여름 가을엔 이곳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음식-5•블루문•2017
바질향이 나는 맥주. 알고 봤더니 바질이 아니라 고수가 함유되어 있던 것이었다. 은은한 풀냄새가 나는 맥주라 자꾸 손이 간다.

음악-7•핸드팬 연주곡•2023
고요하고 싶을 때 유튜브에서 핸드팬 연주 영상을 하루종일 틀어놓는다. 청명한 핸드팬의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공간-7•까치산 근린공원•2019
강서구에는 작은 공원들이 곳곳에 꽤 많다. 산동네라 그런건지, 어린이들이 많아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시설이 많은 공원은 까치산 근린공원이다. 배드민턴장도 있고, 반려동물의 줄을 풀어놓고 놀 수 있는 작은 운동장도 있다. 이곳 놀이터에는 아주 긴긴 미끄럼틀도 있다. 조카들이 집에 오거나 친구들이 놀러오면 이곳으로 산책을 떠난다.

음식-3•알라메다 샤도네이•2020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한 달 전에 미리 날짜를 빼 놓아야 겨우 얼굴을 보는 친구들과 마시는 와인이다. 이 와인이 특별이 맛있어서라기 보다는 그 가게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은 화이트 와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더 비싼 걸 마셔볼까 싶다가도 우리 세 병 이상은 마셔야 하는데, 더 비싸면 부담스러워.. 하며 알라메다 샤도네이를 집어든다. 맛만좋다.

음식-1•김치만두
만두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엄마가 만드는 김치만두는 때마다 생각이 난다. 투박한 맛. 두부와 김치와 다진마늘과 당면(그리고 뭘 넣더라..) 그리고 두꺼운 만두피.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만두가 가진 담백함이 있다. 만두국을 끓여먹어도 맛있지만 살짝 데친 만두를 약불로 오래 구워 겉은 바삭하게 익혀 먹으면 더더 맛있다.

책장-1•몬스테라•2018
어쩌다보니 우리집에 5년째 함께 살고 있다. 분갈이 한 번 제대로 해준 적도 없는데 끝을 모르고 자라난다. 누군가 우리집에 놀러와 몬스테라에게 애틋한 손길을 보내면 주방에서 칼을 꺼내들고 숭덜 잘라 물꽂이 해 나눠주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잎이 어떤 잎을 닮아 태어났는지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책장-4•금강•2016
신동엽 시인의 대서사시 금강을 오래 가지고 있다. 20대 초반의 한 시기에는 이 시의 구절을 달달 외워 읊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그 문장을 외우며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책상-4•자사호•2020
보이차에 빠져 하루에 두 시간씩 차름 마셨던 때가 있었다. 값비싼 자사호와 차판과 찻잔을 나열해두곤 뜨거운물을 부어 다기를 데우고 차를 우렸다. 이 모든 과정을 명상의 일종이라 여기며 차를 마셨다. 지금은 차를 오래 끓여마실 시간이 없어 잠시 찬장에 넣어두었지만 다가올 한겨울에 다시 차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책상-3•건식 족욕기•2020
친구에게서 업어온 건식족욕기가 내 책상 아래에 있다. 겨울에는 족욕기에 발을 넣고 몸을 녹인다. 한창 비대면 수업을 많이 들었던 때에는 하루종일 족욕기에 발을 넣은 채로 살았다. 얼굴은 춥지만 발은 따뜻한 노천탕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옷장-6•플리스•2020
파타고니아아 플리스는 내가 가진 옷중 가장 따뜻하고 튼튼하다. 한 달간의 캠핑에서도, 한겨울의 산책에도 끄떡없이 버텨주었다. 지금도 활동성이 많은 야외로 떠날때면 망설임 없이 이 옷을 꺼내든다.

책상-6•검정펜 0.38•2022
무인양품에서 구입한 0.38 검정 볼펜을 지속해서 쓰고 있다. 한 시절 문구류에 미쳐 여러 종류의 펜과 형광펜 등등을 사 모으던 때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 펜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심지어 리필 잉크를 넉넉히 사놓고 쓴다. 필기감이 부드러워 무엇을 쓰고 그리든 매끄럽게 사용할 수 있다.

음식-2•러시아 케이크•2020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가 그곳의 케이크 맛이 그립다며 모임때마다 사들고 온 케이크. 동대문 우즈베키스탄 거리에 있는 가게의 러시아 꿀케이크가 가장 맛이 좋다.(사실 다른 곳에선 안먹어봤다.) 가게에 드러서면 이국적인 가게 주인과 더더 이국적인 알바생이 맞이해준다. 겨울에 먹으면 더 맛있다.

책장-6•보쉬 전동드릴•2020
공구를 잘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어 무리해서 아주 좋은 전동드릴을 샀다. 살면서 얼마나 많이 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드릴을 사용할때, 어떤 각도로 어떤 힘으로 눌러야 하는지 몸으로 익혀가는 것이 즐거웠다.

옷장-5•일본에서 사온 양말•2018
일본에는 귀여운 패턴의 양말이 정말 많다. 2018년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을때, 사온 양말이 여전히 내 양말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책상-5•팟씨•2019
오래된 빌라에 살고 있어 겨울에는 집을 데우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임시 방편으로 팟시에 끓는 물을 부어 그걸 품에 안고 있는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따뜻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손난로 사이즈의 작은 팟씨와 쿠션 사이즈의 큰 팟씨가 고루 구비되어 있다.

향-7•유스트 오일•2019
빠르게 휘발되는 냄새를 좋아한다. 유스트에서 산 작은 아로마 롤 오일은 내 가방에 늘 들어있다. 기분을 전환하거나 안정시키고 싶을 때마다 커내어 코를 킁킁 거린다.

향-5•편백나무•2020
향이 강한 탈취제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 집에서도 편백나무 스프레이를 탈취제로 사용한다. 아침에 일어나 편백나무 스프레이를 뿌리고 나면 이불을 털면 산뜻한 기분이 든다.

음악-5•보수동쿨러의 Kill Me•2022
어딘가 처절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가사가 좋았다. 괴로울 때 틀어놓는 노래다.

향-6•팔로산토•2019
향을 피우는 걸 좋아하지만 그 매캐한 향이 부담스러울 때, 팔로산토를 불에 그을려 작은 연기를 피운다. 연기는 빠르게 사라지지만 향긋한 나무 탄내가 방을 환기시켜주면 기분이 꽤 산뜻해진다.

음악-6•이고도의 MOUSE•2022
주로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많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 들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책장-7•CRAFTER 기타•2017
친구가 영국으로 떠나며 내게 남겨준 통기타. 기타는 아주 조금 다룰 줄 알지만, 한때는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마음때문인지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기타를 버려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공간-6•작업실•2019
원룸생활을 청산하고 새로 살게 된 집은 방이 세 개다. 하나는 침실, 또 하나는 옷방, 또 하나는 나의 작업실이 되었다. 처음엔 가작 작은 방을 작업실로 활용했지만 지금은 가장 넓고 화장실이 포함되어 있는 방이 작업실이 되었다. 여기서 나는 책을 읽고 작업하고 폼롤러 위에 누워 몸을 푼다. 매일 출근하는 마음으로 작업실로 들어선다.

어떤 순간에 죽음을 떠올리나요?
—죽음에 관한 상념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버겁거나해내지 못할까 두려울 때 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늘 나의 죽음보다는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웠다. 남겨진 이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한꺼번에 싹 다 가버리는 멸망"같은 걸 꿈꿨나 보다.

구체적인 죽음을 떠올렸던 건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당장 내 능력으로 갖출 수 있는 구동력 있는 이동 수단은 오토바이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토바이를 타는 건 꽤 자유로웠다. 하지만 운전하는 내내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야 했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차체가 없는 오토바이는 꽤 위험천만했다. 작은 충돌에도 쉽게 넘어지고 2차 사고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를 조심조심타야지"라는 말은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사고들을 구체적으로 예측하고 상상하는 것과 연결되었다.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죽음 위를 아슬아슬 걷는 기분이 들었고 그것은 꽤 자극적이고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탄 지 한 달째, 유언장을 썼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내가 죽게 된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나요?
원하는 순간에죽음을 맞이하는 건 같은 일일 거다. 누군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돈이 많으면 스위스 가서 편하게 죽고 싶겠지"하고냉소적으로대답해버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죽는다면, 그저 땅에서잘 썩어서 양분이 되어사라지고 싶다. 죽고 나면 흔적도없이 사라질 줄 아는 것이 이 땅에서 잘 즐기며 살다 간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선택적 죽음에 관한 시선이 지금보다 한 층 확장된다면 고통의 증폭을멈출 수 없다고 느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잔잔한 대화를 나누고 떠날 수 있다면 행복할것 같다. 거창한 말이나 행사보다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내가 준비되었을 때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있다면—남은 일생 또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요?
완벽할 순 없겠지만 내가 사는 동안 끌어안고있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싶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늘 남겨진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주 정갈하고 소박한흔적들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남겨진 것들은 나를 지탱하고있던 가장 작고 소중한것일 거다. 그것들을 정리하는 건 나와 가장 가까운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죽음을 떠올렸을 때 어떤 감정이 드나요?
허무하지만 그 허무함이안정감을주기도 한다. 어디로 향하든 끝이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꽤 편하게 해준다.

하지만 종종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수명을 계속해서 늘려줄 거라는 예측을 들을 때면 숨이 턱 막힌다. “더 살아야 한다고?” 한 인간이 가진 데이터를 올려 평생 간직할 수 있다면? (SF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사다) 그것 또한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마치 베트남의 호찌민 주석이 ‘제발 자신을 그냥 묻어달라고, 무엇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를 저온 보관하여 여전히 호찌민 주석 묘에 들어가 죽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이한현실처럼. (물론 그를 기리고 보존하고 싶은 베트남의 맥락은 따로 있을 테지만) 세상에서 지워질권리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는 건 보편적인사실이지만 그 ‘시점'이 언제냐는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 막연함, 어떤 순간에 왜 죽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 아닐까.

나의 죽음보다 나와 가까운 이의죽음이 더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내 생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났을 때 그 상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더 두렵다.
누군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이 있나요?
나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징징거림'을 나누는 모임이있다. 삶의 버거움을토로하는 것을 ‘징징거림'으로 가볍게 표현하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담겨있다. 그렇게 한참을 ‘징징’거리다 보면 어떤 순간엔 별것도 아닌일에 배를 부여잡고 웃기도한다. 그 모임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유쾌하게 넘나들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아 인간은 매 순간 행복하고 만족감을느끼며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구나'를 받아들이게 되는 느낌이랄까. 슬프고 괴롭고 지치고배고프고 졸리고 잠깐 행복하고 다시 쓸쓸하고 반갑고 즐겁고 우울하고.. 원래 다 이러고 사는 거구나 생각하게 된다.
죽음 이후, 남겨진 나의 물건(흔적)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물건은 물건일 뿐이고, 정리하며 흘려보낼 수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내가 떠나고 내 물건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면 등판을 한 대 치며 “미련하게뭐하는 짓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을 것 같다.
나의 물건(흔적)들이 어떻게 정리되면 좋을까요?
다만 남겨진 물건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나를 떠나보내는 데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건은 물건일 뿐이지만 나에 대한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잘 정리하여떠내보내는 시간 역시 상실을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나의 물건을 다 떠나보내고 나와의 대화, 나와의 산책, 나와의 끝내주는 밥 한끼정도를 기억해주면 좋겠다.